쌍용차, 노동-사회 반응 수위 놀랍다 박노자

쌍용차, 노동-사회 반응 수위 놀랍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실체 드러나…파시즘 논의조차 불필요

박노자 / 오슬로대
출처 : 쌍용차, 노동-사회 반응 수위 놀랍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실체 드러나…파시즘 논의조차 불필요

<레디앙> 2009년 08월 06일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살인작전에 가까운 '진압'을 지켜보면서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정부와 경찰, 사측의 수준이야 이미 몇 차례에 만천하에 노출된 일이 있었으니 별로 놀라운 일도 못됩니다.

그들에게는 노동자란 필요할 때에 명령에 따르는 로봇이고, 불필요할 때에 고무총이나 데이저총 등을 쏴서라도 회사 건물에서 좇아내야 할 '방해물' 정도입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생산 요소 중의 비교적을 하찮은 한 요소, 아직도 로봇화가 덜 돼서 어쩔 수 없이 불편하더라도 쓰는, 이런 요소입니다.

  
  ▲ 5일 오전 8시 5분경 크레인 3대에 컨테이너를 연결한 경찰특공대가 조립3,4팀 옥상에 진입하여 조합원들을 연행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사진=노동과세계)

재산 없으면 사람축에 못 끼는 대한민국 사람들

한국형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재산이 없는 이는 원칙상 사람, 또는 시민/국민의 대열에 끼지 못합니다. 재산(부동산 및 학력)이 없어서 고용살이 하는 노동자는 여기에서는 태생적으로 비국민이기에 진압시에 마음대로 때리고 부상을 입혀도 되는 '사냥감'으로 전락합니다.

그런데 진압하는 측의 행동(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망동)은 거의 예상대로지만, 노동계와 사회의 반응 수위는 좀 놀랍습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표명하기 위해 현대기아자동차의 노동자들이 만약 라인 가동을 멈추었다면 지배자들은 '살인 진압'을 벌이기 전에 몇 번 더 생각해봐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경쟁사라는 관계를 뛰어넘어 노동자들의 행동적인 연대가 실천되는 건 여기에서 좀 어렵나 봅니다. 노조 등 소집단마다 지배자와의 갈등에서 결국 '혼자' 발버둥을 치면서 해결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지요.

노동계가 최근 총파업을 선언해도 핵심 동력들이 다 자신들의 이해관계대로 빠져버리고 일반인들이 파업이라는 걸 눈치 채지도 못하는 나라에서는 약자 노동자들이 살인 진압에 노출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입니다. 각개약진형, 파편화형 사회에서는 살인진압도 결국 수많은 뉴스거리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 5일 오전 8시경 조립3,4팀 옥상을 장악한 경찰특공대의 진압을 피하다 7M 높이의 옥상에서 떨어진 차모 조합원이 피를 흘린채 바닥에 떨어져 있다. (사진=노동과세계)

이러한 나라에서 '파시즘'이란 따로 필요하나요? 글쎄, 국제적 경제 여건이 극도로 나빠져 실제 실업률 (취업 대기자, 준비자, 포기자 등 포함)은 오늘의 10%에서 25~30%에 이른다면 또 모르지요. 곳곳에서 일어나는 절망적인 폭동들을 계속 유혈진압해야 하고, 이러한 유혈진압들이 정기화되면 결국 국가의 폭력 기구들은 권력을 자기 손에 집중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지요.

유권자 태반이 진보신당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데 이렇게까지 가지 않을 경우에는 이 나라에서는 파시즘까지 아예 필요조차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과 같은 형식뿐인 보수적인 민주주의, '고등 경찰 체제' 하에서도 맞을 놈 때리고 잡힐 놈 잡고 하려는 대로 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지배자의 입장에서 파시즘이 필요해지는 것은, 반대자(계급혁명 세력, 적어도 급진개혁 세력)의 집권 내지 주도적 영향력 행사가 우려되거나 이미 집권을 해 강제적으로 퇴출을 당해야 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전자는 공산당이 25만 명의 당원과 17%의 총선 표를 가지고 있었던 1933년의 독일의 경우이고, 후자는 급진적 개혁가 아옌데가 이미 집권한 1973년의 칠레 경우입니다. 또 하나의 파쇼화 시나리오는 1937~41년간의 일본처럼 자원이 훨씬 더 많은 외적을 상대하면서 '국민총동원'을 실시하는 경우지요.

일제 말기 일본의 파쇼화 시나리오는 여기에서는 중국/북한과의 극단적인 관계 악화의 경우에는 실현될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은 지금으로서 매우 희박합니다.

  
  ▲ 진보정당과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평택역에서 도장공장 공권력투입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사진=정상근 기자)

그리고 '반대자의 집권'을 이 나라에서 지배자들은 적어도 가까운 10~15년간 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933년의 독일에서는 공산당을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한국에서는 유권자의 태반은 진보신당의 존재 자체를 모릅니다.

민노당의 존재야 그것보다 조금 더 알려져 있지만 한국적인 상황에서 평양 정권에 대한 '친연성'을 보여주었다는 건 이미 '집권 포기'를 의미합니다. 물론 대한민국은 - 비록 말기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도는 아니지만 - 체제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람들의 불평, 불만, 절망, 저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불만의 정치적 조직

그런데 '불만 계층'이 정치적으로 조직되지 않는 이상 이 불만의 에너지는 결국 '개인적 탈출구' - 술, 마약, 자살, 가정 폭력, 범죄 - 로 분출되고 말 것이고, 체제를 위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에서 자기 나라 백성을 굶기는 왕조가 왜 이리 무사한가, 라는 질문에 보통 "경쟁 세력이라고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기득권층의 위기 대책은 아무리 불충분하다 해도 일단 먹혀든다"라는 답은 나오지만 남한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을 포한한 광의의 '지배계급의 정치적 대표자'들과 제대로 경쟁할 세력이 아직도 조직되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굳이 파시즘으로 갈 필요도 없이 그때 그때 곤경에 처한 소집단을 적절히 때려잡고 망가뜨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진화 도약'을 준비한다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의 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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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운 게 있다면, 사회적 약자를 짓밟는 국가나 사회는 옛날 같으면 이미 망조의 길로 들어선 시스템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사회적 약자를 짓밟는 행위쯤이야 영화 한 편 보듯 오락거리로 여긴다.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인간들, 그 진보라는 게 기껏해야 민주당이나 노무현 지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도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언론자유수호니 하는 구호는 자기 삶에서 중요하게 취급해도 쌍용차 노동자들의 목숨 건 투쟁은 먼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쌍용차, 조금 전에 노사합의를 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합의는 개뿔. 실컷 두들겨패다가 일방적으로 도장 찍은 거지.

썩을 놈의 나라, 썩을 넘의 인간들.....

2009 08 06


[박하사탕] - 남성주의 자기연민의 정당화 영화/음악

'나 다시 돌아갈래!' 그 남자의 부활
[세상 vs 영화 마주서다] <박하사탕>…남성주의 자기연민의 정당화

이안젤라 / 영화칼럼니스트
출처 : '나 다시 돌아갈래!' 그 남자의 부활
[세상vs영화 마주서다] <박하사탕>…남성주의 자기연민의 정당화

<레디앙> 2009년 07월 24일



이창동 감독의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박하사탕>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광주’를 텍스트로 삼는 영화이다. 20년 전의 이 사건은 현재 이 땅에서 살아가는 청년 이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근거리의 사건이기에 아직은 ‘역사’라기보다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소위 새 밀레니엄을 여는 2000년 1월 1일 0시라는 상징적인 시점에 개봉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일일 것이다.

1999년 가을 부산 국제영화제 개막작이라는 이름값을 걸고 <박하사탕>이 개봉되었던 초반에 관객의 반응은 썰렁한 것이었다. 그러자 ‘이렇게 훌륭한 한국 영화를 이런 식으로 끝나게 할 수는 없으니 보고 또 보아서라도 스크린에서 내리는 것만은 저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더니 뒷심을 발휘해 47만이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 영화 <박하사탕> 포스터

80년 광주를 분기점으로 분단 이래 관행화 되어왔던 소수 엘리트 중심의 선언적 정치운동은 민중주도의 실천적 참여 및 연대라는 형태로 바뀌게 되었으며,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역사는 동시대인들에게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밝힐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광주'를 말하다

현실과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던 문화 역시 이러한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이후 광주에 대해 다양한 매체로부터 다양한 텍스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텍스트들은 80년대의 철저한 언론 통제 상황 아래서 비합법공간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실기록에서 출발했다.

광주의 실상이 점차 알려지게 되면서 ‘광주문제’는 80년대 모든 분야의 운동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되었고, ‘민주화’의 척도가 되었다. 이후 소설이나 시, 연극, 노래 등을 통해 광주를 재현하고 해석하는 다양한 텍스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텍스트들은 주로 국민 전체를 당시 정치 현실의 피해자로 설정하면서 광주를 순교자로, 당시의 정권, 군부, 언론, 미국, 재벌 등을 가해자로서의 적으로 규정하고(정치적 입장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광주 외부의 사람들에게 광주에 대한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서술방식이 주축을 이루었다. 순교자로서의 광주와 피해자로서의 국민의 연대감을 촉발하는 이런 서술방식은 텍스트의 수용자에게 정치적 실천을 촉구하는데 강력한 정치적 선전선동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나 규제와 검열에 의해 가장 강한 통제권 하에 놓여있었던 영상매체는 그 행보가 비교적 더딘 편이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드러나는 ‘광주’는 기존의 다른 매체로부터 직간접적 영향을 받은 후에,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참여와 실천의 요구를 비껴간 후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광주의 정치적 해결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90년대 이후에야 합법적인 영상매체가 광주를 텍스트로 다룰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시기는 대부분의 국민이 87년의 대대적인 시민운동인 ‘6월 항쟁’을 기폭제로 하는 정권교체, 문민정부 수립 등의 정치적 변화와 실망 등을 체험한 이후로서 정치적 피해자로서의 연대감을 광주와 공유하기에는 거리감이 형성된 시기이다.

그러면서 광주에 대한 영화 텍스트는 이제 80년 5월 당시의 광주를 우리 역사의 정치적 외상으로서 해결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의 대상으로 호명하는 <꽃잎>과 같은 피해자 중심적 서술방식의 영화가 등장하게 되었다.

가해자 중심적 서술 <박하사탕>

그러다가 광주에 대한 정치적 이용을 통해 ‘호남출신 대통령’ 김대중 정권이 등장한 이후, 신보수주의의로 지칭되는 우익 세력이 결집되면서 광주에 대해 ‘화해와 용서’를 요구하게 되었다. 광주에 대해 가해자 중심적 서술이 가능해진 <박하사탕>의 등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짚어볼 때 그 의미가 다시 새겨질 수 있다.

상업적 영상매체를 통해 광주가 드라마의 소재로 처음 가치를 드러낸 것은 94년 SBS 드라마 <모래시계>를 통해서였다. 이 드라마는 소위 ‘모래시계 세대’라는 용어를 만들어내면서 8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던 이들의 영상매체에 대한 상품적 가치를 드러냈다.

  
  ▲ 드라마 <모래시계>와 영화 <꽃잎>

이 드라마에 등장한 광주는 중심소재라기보다는 전체 내러티브를 풍성하게 받쳐주는 서브 플롯 가운데 하나였지만 ‘광주’를 드라마라는 형식을 통해 재현했다는 사실과 그 재현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평가가 아니라 막연한 휴머니즘적 시각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로 평가되었다. 또한 <모래시계>를 통해 ‘광주’가 영상물로서 매혹적인 상품가치를 가진 소재이면서 더 이상 완벽하게 통제된 금단의 사과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모래시계> 이전에 91년 이정국 감독이 영화 <부활의 노래>를 통해 광주를 영상화한 적이 있으나 이 영화는 심의와 검열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개봉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은 바 있다. 이후 정치적 여건이 바뀌면서 ‘광주’에 대한 검열의 수위도 달라지게 되었으며, <모래시계>가 그 시험대 역할을 하게 되자 1996년 장선우 감독은 <꽃잎>을 제작하여 5.18의 영화적 재현을 시도했다.

<부활의 노래>부터 <박하사탕>까지

<부활의 노래> 관객이 만여 명에 그친 것은 열악한 상황과 제작 여건에 따른 영향이 컸다고 한다면, 광주를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여론의 주목을 받으며 제작된 <꽃잎>이 23만 관객을 불러들여 한국영화의 평균은 넘어섰지만 드라마 <모래시계>의 폭발적 신드롬에는 못 미치는 결과를 보인 것은 ‘광주’라는 사건에 대해 재현 자체보다는 해석의 관점이 중요해지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하사탕>의 흥행은 광주라는 사건을 다루는 형식의 변화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박하사탕>은 1999년 어느 날 철로 위에 서서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소리치는 한 남자가 그 곳을 출발점으로 해서 시간이라는 레일을 타고 역사라는 기차를 거꾸로 돌려 개인의 삶이라는 창을 통해 보는 여정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99년 주인공이 갑작스레 뛰어들어 망쳐버리는 ‘야유회’를 현재로 시작해서 79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7개의 단락으로 나누고 한 지점씩 머물면서 처음에는 모호하던 그의 종착역이 분명해질 때까지 2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

먼저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야유회’로부터 출발해서 주인공 영호가 그 며칠 전 죽어가는 첫사랑을 만나면서 기억을 불러들이는 장치로서의 ‘사진기’, IMF 이전 경제적 호황기인 94년의 속물 쁘띠 부르주아로서 갈고 있던 시절의 ‘삶은 아름답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87년 수배자인 운동권 학생을 잡으러 간 지방에서 술집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면서 하는 ‘고백’, 전두환 정권의 지독한 억압의 시대 84년에 형사가 되어 첫사랑과 헤어지고 식당집 딸과 섹스를 하기 전에 하는 ‘기도’에 이르기까지 흔한 통속극에 흔히 등장하는 인물들의 전형적 삶을 보여준다.

그 통속성은 관객의 동일시와 몰입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면서 뻔한 공식대로 다음 지점에서의 반전 또는 회차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대한민국 남성의 통속성을 양성하는 터전인 군대가 바로 그 지점이다. 80년 5월 이등병 시절의 영호가 영문도 모르고 자의식도 없이 광주에 허겁지겁 파견되는 ‘면회’에서 그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라 청년기를 상징하는 표상이 되어 첫사랑과 이별하듯 광주를 지나쳐서는 79년 구로공단의 푸릇푸릇한 야학 청년들 속에 끼어들더니 눈물 한방울로 보편적 순수의 상징을 획득하는 ‘소풍’ 장소에 간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어가는 과정

이렇게 꽉 짜인 형식은 극중 실제 화자의 존재를 감추고 주인공을 통해 관객에게 일방적 메시지를 강요한다. 이창동 감독은 영화 속에서 선형적인 이야기 구조를 분절시키고, 시간의 역으로 사건들을 배치하면서 삶을 인과론적으로 설명한다.

또한 미스터리 장르 기법과 플래시백을 통해 완벽하게 조직화된 내러티브를 구축하면서 타락과 폭력의 주체로서 사회에 대한 가해자였던 한 남자를 개인의 의지와 무관한 역사와 체제에 의해 철저히 짓밟힌 피해자로서 존재증명을 해준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플롯의 구성은 철저하게 계산되고 도식화되어 있다.

영화는 노동계급 출신의 비지식인 주변인으로서의 남성을 통해 개인의 삶이 역사적, 시대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폭력적으로 중층 결정되는 과정에서 실존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 내러티브의 폐쇄성은 영화 속 화자가 주체가 아니라 실제화자로서의 작가만이 주체이며 관객은 이 영화가 제시하는 텍스트를 생산적으로 해독할 길이 봉쇄된 채 수동적 청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감독 자신은 이런 짜임새에 대해 ‘시간을 거꾸로 가고 싶다는 욕망은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하는 욕망과 같다’고 말하고, 자신이 영화 속에서 선택한 연도들이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지점임을 인정하면서 그런 시간의 선택과 배열을 위해 선택한 장치로서의 사진과 기차를 선택한 까닭을 설명했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시간을 한 순간 움켜잡으려는 것인데 영호가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것은 시간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려는 감독 자신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며, 거꾸로 가는 시간을 일깨울 이미지로 기차를 사용하면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슬픈 정서로 풀어내고자 했음을 밝혔다.

그래서 <박하사탕>은 정치적 폭로나 이데올로기적 저항, 역사적 사건이 갖고 있는 정치적 함의에 대한 추구보다는 광주의 직접적인 피해자를 제외한 국민 전체를 가해자로서의 위치에 세워 놓고 정치적 저항성, 진보적 실천 행위보다는 공범의식에 기반한 역사의 피해자로서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현재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주인공 영호는 80년 당시를 기점으로 이후 내리 폭력과 타락을 직접적으로 행사한 가해자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영화의 마법을 통해 가련한 역사의 피해자로 거듭난다.

그는 <넘버3>의 깡패 검사 마동팔의 ‘죄가 무슨 죄가 있냐, 죄 지은 놈이 나쁜 놈이지’라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죄지은 자가 무슨 잘못이냐, 상황이 죄일 뿐’이라고 두 눈 부릅뜨고 강변한다. 불의를 저지른 자들, 그 앞에서 비굴하게 숨죽였던 자들 모두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 면죄부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죄지은 자가 무슨 잘못이냐, 상황이 죄일 뿐"

이렇게 실천적 주체로서가 아닌 역사 속에서의 수동적 존재로 설정된 가해자 입장에서 ‘광주’를 진술하는 <박하사탕>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은 한 개인의 삶을 회상해 나가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시대의 알리바이를 조직화해낸다.

남자의 회상은 치밀하게 계산된 역사의 재구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청년기의 순수, 첫사랑의 신화, 쁘띠 부르주아 가정의 붕괴, 권위를 상실한 남성의 불행 따위의 아주 익숙한 장치들을 클로즈업해 들이민다.

  
  ▲ 영화 <박하사탕> 한 장면

이 모든 장치들이 봉사하는 것은 파시즘의 다른 이름인 남성주의의 자기연민에 대한 정당화다. 이런 정당화는 우리 역사에 꾸준히 반복되어 온 하나의 경향이다. 반민특위를 무산시키고, 박정희를 부활시키고, 전두환을 복권시킬 수 있었던 역사의 고질병이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소리지르는 순간 스무 살 청년으로 눈물 흘리며 부활하는 것이다.

그 부활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 우리 시대의 영화이며 그 영화를 승인한 것이 우리 시대의 대중이라면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그 남자 김영호는 기차에 치어 죽은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새파란 청춘으로 거듭 태어났음을 깨닫는 것, 언제 어디서고 불현듯 나타나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 우리를 욕조에 처박을 수 있는 그 자가 바로 우리 안에 살아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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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에서 이창동 감독이 만들어낸 영화적 시간의 재구성은 글쓴이가 말하는 것처럼 "치밀하게 계산된 역사의 재구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확실하다. 그 역사의 재구성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해낸 익숙한 영화적 장치들인 "청년기의 순수, 첫사랑의 신화, 쁘띠 부르주아 가정의 붕괴, 권위를 상실한 남성의 불행" 등이 "봉사하는 것은 파시즘의 다른 이름인 남성주의의 자기연민에 대한 정당화"라는 글쓴이의 주장에 감독이 얼마나 동의할 수 있을지는 논외로 한다면 말이다.

이창동 감독은 오래 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시간의 재구성'이라는 <박하사탕>의 서사구조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출발점으로 다시 가고 싶어서다. 많은 게 변했는데, 이 변화로 우리는 편할지는 모르지만 행복하지 못하다. 무엇이 언제 어떻게 변했는지 하나씩 살펴 보면 차츰 우리의 처음이 드러 날 것이다."

이창동 감독이 생각하는 출발점에는 도대체 어떤 것이, 변하지 않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단순한 회고취향은 아니었을까?

"20년 전에 사람들은 '공동선'이란 걸 믿었고, 이상을 향해 가는 길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쨌든 그런 믿음이 일정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이상해졌다. 옳은 소리 하면 썰렁해지는 시대가 돼버렸다. 시대의 변화와 나의 변화가 일치한다. 20대에 쉽게 꿈꾸고 쉽게 절망했지만 옳은 것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이제 뭐가 먼지 나는 모른다. 이기적 욕구만 항상 있다. 그러다 보니 세기말이다. 아무런 전망도 없다. 영화 속에서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

"회고 취향이 결코 아니다. 마지막 장면의 20대 주인공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현재성으로 다가갈 것이다. 과거가 현재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면 왜 과거를 이야기 할 것인가.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환한 기분을 가지기를 기대한다. 박하사탕의 맛처럼…."


하지만 여기서 시간은 추상적 시간도 아니고 개인적 일상에 한정된 시간도 아니다. 개인의 시간은 현대사의 시간과 끊임없이 만나고 충돌한다. 이렇듯 한국의 현대사는 개인사를 개인의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끊임없이 교란시켜 시대의 전장으로 끌고 들어온다. 바로 이 지점이 "이 모든 장치들이 봉사하는 것은 파시즘의 다른 이름인 남성주의의 자기연민에 대한 정당화"라는 글쓴이의 비판이 발언권을 얻을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한다(일단 여기서는 비판의 정당성 여부는 논외로 하지만, <박하사탕> 이후 <오아시스> 등을 거치면서 어딘가 모르게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주는 불편함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상당수 있어왔다는 사실만은 언급해두자).

역사성을 제거한 시간의 재구성, 가해자에 대한 휴머니즘적 감정이입, 그리고 화해와 용서의 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러한 영화적 장치들만큼 대중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억압과 폭력의 역사를 공고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억압기제가 또 있을까? 궁극적으로 지배집단의 폭력과 이익을 대변하는 이런 논리가 비록 미필적 고의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예술의 모습으로 우리의 감정과 정서 자체를 마비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국가기구가 장악한 교육기관보다 때로는 더욱 더 무서운 이데올로기적 억압기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덧붙이자면, 이 영화 <박하사탕>이 만들어질 즈음부터 우리 사회는 하나의 유령이 떠돌기 시작한다. 변절논란을 불러 일으킨 이른바 '운동권 커밍아웃'이라는 유령. 이재오, 김문수 등이 김영삼 정권에 합류한 소극적 커밍아웃이라면 박형준, 신지호 등은 자아비판(신지호는 대표적으로 이른바 공식적인 '변절성명'까지 발표한 케이스다. 자기가 운동해봐서 안다는 논리.)을 곁들이는 적극적인 커밍아웃에 해당한다.

이런 공인들뿐만 아니라 사적영역에서의 커밍아웃 또한 DJ집권을 전후로 만개한다. 인터넷의 보편화에 따라 쉽게 드러난 현상일테지만, 툭하면 자기도 '옛날'에는(그들에겐 80년대도 이미 옛날이다) 감옥까지 갈 정도로 열성적인 운동권이었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이제는 시대가 변했으니 DJ에 대한 비판적지지,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지지를 호소하는 모습들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의 논쟁, 주로 독도문제에 따른 민족문제, 이라크 파병에 따른 국익에 대한 논란, 이주노동자 문제에 따른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 등에서 인터넷을 통한 사적 공간에서 논쟁이 벌어질 때 자신의 자랑스런 운동권 경력을 들먹이는 일도 허다했다. 그게 무슨 승리를 보증하는 '논리'라고 참 유아틱 하기는. 민족, 국익, 타자의 문제에 관해서 보수적이고 우익의 관점에 서 있다면 상식적으로는 자신의 운동권 경력을 되도록 숨겨야 정상이 아닌가? 부끄러움을 안다면 말이다! 하여튼 세상은 참 요지경이다.

2009 07 25


[김규항] 그들의 싸움 김규항

그들의 싸움
[야! 한국사회]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출처 : [야!한국사회] 그들의 싸움
<인터넷 한겨레> 2009년 07월 15일



»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오늘 언론인들의 싸움 속에서 ‘언론 장악’이라는 걸 무슨 비윤리적이고 파렴치한 일처럼 말하는 건 보기 민망하다. 언론 장악이야 어느 정권이든 하는 것이다. 극우 정권이든 자유주의 정권이든 혹은 좌파 정권이든 정권을 장악한 세력이 주요한 제도언론을 장악할 수 있는 한 장악하는 건 올바른 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테면 정연주씨나 최문순씨가 이명박 정권에서 <한국방송>이나 <문화방송> 사장을 맡을 가능성은 있는가? 뒤집어 말해서, 오늘 이병순씨나 구본홍씨가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에서 한국방송이나 <와이티엔> 사장을 하는 걸 상상할 수 있는가? “이명박이 언론 장악을 한다”는 말 자체부터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언론 장악을 전제로 하는 말인 것이다. 낙하산 인사인가 아닌가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차이는 그런 경향성을 뒤집을 만한 차이는 아니다.

핵심은 ‘언론 장악의 비윤리성’이 아니라 언론이 어느 세력에 장악되는가, 어떤 계급의 편에 서는 언론이 되는가이다. 이렇게 말하면 오늘 이명박의 언론 장악을 비판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라고 할까?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정의감에 찬 얼굴로 자신들이 언론을 장악하면 인민의 언론이 되고 이명박이 언론 장악을 하면 부자와 재벌의 언론이 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언론을 장악했던 지난 10년 동안 그들은 정말 인민의 편이었던가? 그들은 줄기차게 진행된 신자유주의 개혁을 반대하고 저항했던가? 조중동의 성원들과 경쟁하고 반목했지만, 그들 역시 부자와 재벌의 편이 아니었던가? 몇몇 지나치게 불거지는 일들에 대해 보인 의미있는 성과들도 그들의 성과가 아니라 몇몇 결기 있는 기자나 피디의 개인적 용기가 만들어낸 행동이 아니었던가?

물론 그들은 그들의 적에 비하자면 얼마나 훌륭한 언론인들인가. 그 명백한 차이와 상대적 자긍심을 인정한다. 그들 입장에서 오늘 싸움은 저놈들이 장악하는가, 우리가 장악하는가의 절체절명의 싸움이라는 것도. 그러나 대다수 인민이 보기에 그리고 그들의 편에서 생각하는 좌파가 보기에 그 싸움은 저놈들의 싸움도 우리의 싸움도 아닌 ‘그들의 싸움’일 뿐이다.

어렵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맥빠지게 하려는 게 아니다. 완고한 계급주의로 현실의 싸움을 함부로 폄하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싸움이 힘을 얻길 바란다. 그러려면 그들의 싸움이 그들만을 위한 싸움이 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은 말한다. “그래도 최소한 언론이 극우세력에 넘어가는 건 막아야 하는 게 아닌가.” 백번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극우세력에 넘어가는 걸 막는 싸움이 결국 그들의 이해로 귀결되어선 안 된다.

나는 그들이 인민들에게 지지와 연대를 호소하기 전에 그들 자신을 되돌아보길 바란다. 언제나 인민들에게서 ‘기자님’ ‘피디님’이라 불리는 그들은 정작 인민들에게 뭘 했는지 되돌아보기 바란다. 그들은 언제나, 특히 그들이 언론을 장악했던 지난 10여년 동안 인민들의 지지와 격려로 그들의 힘을 유지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인민의 편이었던 적은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성찰하기 바란다.

그런 인정과 성찰이 그들의 싸움을 훼방할까? 천만에. 오히려 그런 인정과 성찰이야말로 그들의 적으로부터 그들의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하고 훨씬 더 많은 인민들이 그들의 싸움을 지지하게 만들 것이다. 지금 인민들이 그들의 싸움을 더 열렬히 지지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그들이 저놈들보다 나은 건 분명한데, 그렇다고 온전히 내 편이라는 생각도 안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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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대선과 2007년 대선 때의 풍경 하나.

2002년 대선때 노사모 회장까지 했던 영화배우 명계남씨는 이회창 지지선언한 연예인들을 일러 '닭(돌이었나?)대가리' 운운하는 발언을 해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자신은 노사모 회장도 모자라 전국을 돌며 노무현 선거운동까지 하면서 다른 연예인들이 이회창 지지하는 것은 닭대가리라서 그런 것이라니?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고방식 아닌가?

그들, 연예인들도 누구를 지지선언할 권리가 있다. 이걸 인정해줘야, 상대편 지지선언을 인정해줘야 우리편 지지선언이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편 지지선언은 잘하는 것이고 상대편 지지선언은 골빈 놈들이 하는 짓이다?

2007년 대선 때도 일부 연예인들의 이명박 지지선언으로 작은 논란이 있었다. 일부는 본인의 동의 없이 그랬다는 둥의 작은 헤프닝이 있었지만, 이것보다는 이를 싸잡아 매도하는 자칭 '진보주의자들', 다시 말해서 노무현 지지가 진보라고 믿는 얼치기 진보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이 따지고 보면, 더욱 더 웃기는 짓거리다.

난 이명박 지지선언하는 연예인보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 지지 안 한다고 싸잡아 골빈 놈이라고 비난하는 명계남 류가 더 '한심한 이성'이라고 생각한다. 연예인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지지하면 그냥 격려해주고, 좀더 적극적으로는 음반 하나 더 사주고 그들이 나오는 영화 한번 더 봐주면 된다. 다른 정당 지지하면 그냥 무시하고, 좀더 적극적으로는 음반 안 사고 그가 나오는 영화 안 보면 그만이다. 이것이 논리의 일관성, 사고의 일관성, 행동(실천)의 일관성을 가진 이성적(합리적) 태도 아니겠는가? 

덧붙여 이명박만 반대하면 반독재가 되고 민주주의 회복이라며 반이명박 연합, 반독재연합이 인민들을 위한 무슨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떠들어대는 민주당류의 자기독선 역시 인민들의 삶이 아닌 자신들의 자기만족을 위한 강령에 지나지 않는다(자신들은 민주당류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노무현 지지자들 또한 마찬가지일 뿐이다).

2009 0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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